봉황 과자

추석 이틀 전날 과자점 아줌마가 상자를 쏟으셨길래 주워담는 걸 도와주었더니 고맙다면서 조그만 모니카를 하나 주었다. 미니 차이니스 봉화앙이라는 괴이한 이름의 과자였다. 스무개 좀 안 되게 들어있는 한 상자가 육만원이라고 했다. 하나에 대략 삼천 오백원인 셈이다. 파인애플 맛이었는데 도무지 삼천 오백원의 맛은 아닌 거 같았다. 또 중국산 주제에 너무 비싼 거 아니냐. 하여튼 신기해서 찰칵. 나는 삼천 오백원짜리 과자 하나보다는 삼백 오십원짜리 과자 열이 좋다. 우리나라도 삼천 오백원짜리 과자 하나 말고 삼백 오십원짜리 과자 열을 만드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삼십 오원짜리 과자 백이면 더 좋다. 공짜면 더더욱 좋다.
by 콘라드 | 2008/09/15 15:36 | 말하기 | 트랙백 | 덧글(2)
데드 존(The Dead Zone, 1983)

스티븐 킹은 아마도 영화화 판권 로열티를 책 인세만큼 벌지 않았을까.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이 연출한 [데드 존]도 스티븐 킹이 원작을 썼다. 드라마로도 있다던데 아직 구경하지 못했다. 중간쯤 나오는 가위 자살 씬 빼고는 크로넨버그 감독 특유의 섬찟하고 끔찍한 영상이 별 없다. 크로넨버그표 영화라 은근히 기대했는데 실망하였다. 게다가 원작 소설도 그런지 아직 못 읽어서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끌어다 써서 덕지덕지 실로 꿰매어 붙인 듯한 인상이다. 좋게 말하면 콜라주 모양새다. 그래도 이야기는 재미있다. 그것은 아마 멜로와 정치풍자와 에스에프와 스릴러와 호러의 경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썰을 풀기 때문일 것이다. 한가지 웃기는 일이 있었는데 디비디 케이스 뒷면에는 "자동차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손을 잡으면 타인의 과거와 미래를 보는 초능력을 얻게 된 남자가 옛 애인과 결혼하는데 애인의 전 남편이 알고보니 암흑가 보스라서 홀로 고민하게 된다"는 간략한 시놉이 쓰여져 있는데 자동차 사고 당하는 거 빼고는 도무지 하나도 맞는 게 없다. 어이가 없었다. 덕분에 결혼 장면은 언제 나올까 영화 보는 내내 기다렸다. 영화도 보지 않고 시놉시스 적어서 팔지 않았으면 좋겠다.
by 콘라드 | 2008/09/14 04:38 | 영화보기 | 트랙백 | 덧글(3)
조디악(Zodiac, 2007)

누구나 정점에 오르는 순간이 있다. 수학자가 최고의 능력을 보이는 때는 열다섯 살 즈음이며 마흔 살이 넘으면 끝났다고 보는 게 정설이란다. 그렇다면 영화감독도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을까. 데이빗 핀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파이트 클럽(Fight Club, 1999)]은 신나는 영화지만 원작이 워낙에 대단하여 덩달아 영화도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핀처는 [세븐(Se7en, 1995)]이 너무 좋았다. 다른 작품을 뵈지 않게 할 정도로 엄청 좋았다. 대접에 머리를 처박고 핏줄이 툭툭 불거지도록 부풀어오른 시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음울한 공기와 성경의 일곱가지 죄악을 멋지게 뚜룩친 솜씨,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이 화면 밖 나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핀처의 영화 세계는 기본적으로 [세븐] 이후 꾸준히 하향곡선을 그려 왔다고 생각했다. 마치 패닉 룸으로 도피한 것처럼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듯한 행보를 보면서 핀처의 추락이 분명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나는 [조디악]을 극장에서 보지 않았다. 어느날 책을 주문하려다 디비디를 싼 값에 팔길래 오랜만에 핀처 얼굴 좀 볼까 싶어 함께 주문했던 것이다. 밤늦게 기네스 맥주와 맛밤을 준비하고 디비디를 돌렸다. 영화가 끝나자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멍청해진 내 앞으로 핀처가 다가와 정신 차리라고 일갈하며 따귀를 거하게 올려붙였다. 뺨이 얼얼했다. 가까스로 환상에서 돌아와 보니 나는 스르르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만 넋놓고 보고 있더라. 떠듬떠듬 잘못했어요 말하면서 또 디비디를 거듭 돌려 보았다. 아마 그때부터 이제까지 열 번은 돌려 보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를 조디악 킬러의 시대로 데려다 주었다.

나이 서른에 [에일리언3(Alien 3, 1992)]를 만든 천재였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데이빗 핀처는 [세븐]이 정점이었다. 그 영화가 너무 뛰어나서 핀처는 더 이상을 만들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세븐]은 데이빗 핀처 최고의 영화였다. 맞다. [조디악]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핀처는 스스로를 깨치며 정점 위로 도약했다. 첫 살인 씬에서 핀처가 옛날에 보였던 폭발하는 화려한 스타일을 찾아볼 수 없다. 절제되어 있다. 대신 총알이 몸뚱이를 관통하는 순간을 정교하고 세심하게 잡아낸다. 희생자가 얼굴을 괴롭게 찌푸리며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모습과 피가 이리저리 튀어 흐르는 걸 주목한다. 이건 진짜, 진짜배기 살인이다. 모자르지 않고 넘치지 않다. 딱 보여줄 만큼 보여주니 그 현실감이란 무서울 정도다. 그렇게 조디악 킬러가 나타났다. 실화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걸 알고 보면 더욱 무섭다. 카메라가 찍는 당시 미국의 불안한 시대에서 조디악 킬러에 대한 관심은 전국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사회 곳곳에서 저마다 조디악의 옷자락을 붙잡으려는 짓이 낳은 결과는 오히려 미국 땅에 켜켜이 쌓여 있는 부조리를 들쑤시는 것이었다. 거의 다 잡은 듯싶던 조디악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걸 눈 뻔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한다. 사건은 미궁 속에 빠지고 어느덧 조디악은 전설이 되었다. 단순히 유명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조디악 킬러는 전설적인 존재로 재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이쯤 되면 [조디악]의 이야기는 살인마가 아니라 살인마를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변신해 있다. 조디악은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었으니 전설이란 허상을 손아귀로 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화면은 전설을 쫓는 세 사나이의 모습을 비추면서 스무 해의 세월을 묵묵히 추적한다. 조디악은 블랙홀처럼 그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쭉쭉 빨아먹어 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거듭해서 실패하고 거듭해서 붕괴한다.

흔히 [조디악]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과 곧잘 비교되고 미국판 살인의 추억으로 불렸다. 둘 다 훌륭한 영화이고 무척 닮았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이 실화를 재료삼아 요리하여 더 재미있는 스릴러를 만들었다면, 실화를 날것으로 분해하고 조합하여 재현해낸 [조디악]은 더 솔직한 드라마다. 핀처에게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라고 다소 호들갑스런 수사가 붙는다. 데이빗 핀처 감독은 테크닉의 과시가 아니라 테크닉의 절제로 테크닉의 황홀한 절정 경지를 보여주었다. 마지막까지 조디악은 전설로 남는다. 새천년을 맞아 세상은 전자화되고 첨단화되었으나 전설이 잡힐 리 없다. 유력한 용의자는 죽었다. 추적자들의 생도 달라졌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수사를 미완으로 종결했다. 분명 조디악의 전설은 접근하는 이들을 망가뜨릴 테다. 진실의 부스러기조차 붙잡지 못하는 독한 공허감에 질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걸 똑똑히 알면서도 여전히 조디악 킬러를 쫓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감이나 사명감으로는 결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집념의 영역이다. 수사는 아직 진행중이다. 끝내 조디악은 꼭 잡힐 것이다.
by 콘라드 | 2008/09/14 04:10 | 영화보기 | 트랙백 | 덧글(4)
잡지들

내가 읽는 잡지들. 시사잡지와 영화잡지다. 왼쪽부터 씨네이십일, 프리미어, 시사인, 한겨레이십일, 필름이점영이다. 물론 이 다섯 잡지를 매번 죄다 사지는 못하고 그냥 지하철역 들를 때마다 기회랑 돈이 되는 대로 산다. 필름이점영보다는 씨네이십일이 우선이고 한겨레이십일보다는 시사인이 우선이다. 씨네이십일은 컨텐츠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다른 영화잡지보다 탁월하다. 특히 기획기사가 알차서 좋다. 거기에 비하면 필름이점영은 좀 떨어지지만 우선 필름이점영과 프리미어는 천원짜리니까 그저 반갑다. 거기에 프리미어는 격주간지라서 부담이 한결 덜하다. 프리미어에는 신기주 기자와 허지웅 기자가 있다. 허지웅 기자는 글을 참 술술 읽히도록 재미있게 쓴다. 신기주 기자는 파편화된 정보를 한데 모아서 큰 구도를 짜는 통찰이 대단하다. 지적인 깊이가 느껴진다. 천원이란 가격이 땡큐긴 한데 좀 가벼운 기사들이 많아서 아쉽다. 난 원래 대학 새내기때부터 한겨레이십일을 꼬박 읽었는데 시사인이 창간되자 둘 다 사보다 결국은 시사인을 우선하게 되었다. 한겨레가 시장원리에 잠식되어 옛날의 진보성을 많이 까먹은 까닭이다. 한겨레이십일이 주변적인 문제를 다루고 전체적인 틀에서 에둘러 둘러본다면 시사인은 독립언론을 지향하는 매체답게 현시점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훨씬 공격적이고 집요하다. 자본권력에 맞서 싸우면서 괴로운 세월을 이긴 기자들이니 강한 자존심만큼 기사의 수준도 훌륭하다. 대신에 정치사회면의 압도적인 강세에 비하여 예술문화면의 파워가 떨어지긴 하다. 시사저널 사태가 벌어졌을 때부터 관심을 두고 있었고 파업 백일 문화제도 함께했기 때문에 시사인에 대한 사랑이 크다. 나는 시사저널 노보 특별판과 문정우 편집국장님이 덕담과 함께 싸인을 해 준 시사인 창간호를 소중하게 모셔두고 있다.

by 콘라드 | 2008/09/11 19:13 | 말하기 | 트랙백 | 덧글(2)
재건 아저씨가 보낸 선물

더러운 판갤러 재건 아저씨가 내가 무진장 갖고 싶어했던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를 보내 주었다. 사실 한국 땅에서 얼마 없는 아나키즘의 (이 말을 싫어할 듯싶지만)'권위자' 박홍규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이 모두 재건 덕분이었으니 고마운 마음이 크다. 박홍규의 책을 좀 읽고 나니까 이 책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기가 막히게도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책이 벌써 절판이라니 그 심정 참으로 황당하였다. 인터넷 헌책방을 뒤졌으나 마땅히 파는 곳도 없고 헌책방 순례를 다니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혹 재건에게 이 책이 있지 않을까 싶어 후한 값으로 사겠다고 넌지시 물어봤는데 흔쾌히 공짜로 보내주었고 더구나 택배비까지 다 부담해 주었다. 최소한 택배비는 내가 내야 하는 게 사람된 도리인데 당시에는 너무 신이 나서 주소만 달랑 불고 말았다. 무지 고맙고 죄스럽다. 허어 이거 참 책이 다치지 않도록 상자에 신문지를 꼭꼭 채우고 뾱뾱이까지 둘둘 말아 정성스레 보내준 모양새를 보니 이거 큰일이다 혹시 재건 아저씨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쾌한 의심이 들었다. 아무튼 재건 아저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을 좀 덧붙이자면 이걸로 혹시 재건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상자에 떡하니 보이는 그 이름이 퍽 특별한 것이라 깜짝 놀랐다. 한국인 이름으로도 말이 되긴 한데 정말로 이게 진짜 이름이라면 재건은 위대한 추리소설 작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셈이다. 아무래도 이름을 밝히기 싫어 가짜로 썼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글쎄 과연 어떨까. 난 안 믿는다. [박홍규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 책 아래에 다른 이름이 또 쓰여져 있던데 이게 진짜 이름 같다는 추측을 할 뿐이다. 알 길은 없다. 진실은 저 너머에. 하여간에 거듭 고맙습니다.
by 콘라드 | 2008/09/11 18:37 | 말하기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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