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기억

요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를 읽고 있다. 어느덧 2권째에 접어들어 반 정도를 남겨두었다. 마이니치 신문의 호들갑에는 실소가 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 양반이 그간의 공백을 충분히 메우는 글을 써냈다 싶다. 고등학교 때 [어둠의 저편]을 읽고 어찌나 실망했는지(책값을 생각하니 실망보다 절망이었다) 다시는 하루키를 읽지 않으리라 맹세했었다. 허나 역시 다시금 집어든 걸 보면 하루키적 관성이란 것이 몸에 체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하루키를 읽기 시작한 지 대략 팔 년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으레 그렇듯이 나도 [상실의 시대]로 하루키를 처음 만났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하루키를 두고 이른바 중2병 작가라고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많은데 아예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루키와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때는 여자친구와 지리멸렬하게 헤어진 중2 때였다. 그럼 중2병을 앓았던 것인지 무언인지 하여튼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는 와타나베처럼, 그렇게 멍청해져서 가슴에 뻥 뚫린 구멍으로 휑하니 드나드는 바람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하루키의 책을 열댓 권 정도 사게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장편은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고,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는 일에 대하여]다. 그리고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는 터프한 사내아이가 되고 싶어 열심히 운동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 중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정말이지 하루키는 혼곤한 기분에 어울린다. 속세를 잊고 그만 까무룩 잠들고만 싶을 때 하루키만한 마취제가 없다. 지독한 무기질적 관조. 그렇다고 대충하는 법도 없이 무척 꼼꼼한 하루키식 화법. 그러니까 페니스가 어쩌구 바기나가 어쩌구, 자지가 어쩌구 보지가 어쩌구 해도 결국 내 아랫도리는 근엄하게 늘어져 미동도 없다. 야설 대용으로 쓴다고 하루키를 집어든 소년들이 실망하는 꼴을 많이 봤다. 꼴려라 꼴려라 기도하다 끝내 실패한 누군가가, 혹시 하루키는 고자가 아닐까? 고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글을 쓴단 말인가! 하고 퍽 잔인한 추측을 하는 걸 듣기도 했다. 그 사실 여부는 모르지만 하여간 하루키의 문장을 읽으면 회색깔 세상에 나도 물들어 함께 잠겨들지 싶다. 돌이켜 짚어보면 왕년의 문학소년이었던 나도 많이 변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 참 많이도 읽었는데 말이다. 그만 좀 읽고 공부 좀 하라고 타박 많이 당했다. 까뮈니 보르헤스니 뿌쉬낀이니 찾아다닐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하루키나 겨우 읽어내고 있다. 많은 작가들을 잊(잃)어버렸다. 아무래도 세월의 썰물이 빠져나가고 보면 기억의 백사장에는 가장 무거운 것들만 남아있나 보다. 그러니 하루키는 내 짐작보다 무거운 것이었음이 확실하다. 오늘은 날이 밝을 때까지 [1Q84]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야겠다. 문득 싱싱한 오이를 생김에 싸서 간장에 찍어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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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콘라드 | 2009/09/17 04:53 | 말하기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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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17호 at 2009/09/17 05:53
어둠의 저편땜에 많이 떨어져 나갔씀
Commented by Cephas at 2009/09/17 09:47
꼭 책도 별로 안 읽어본 사람들이 하루키 하루키.. ㅡㅢ;; 한국 문단이 상실되어 가는 줄 모르고 몇십년째 상실의 상실의 시대. 결국 번역하면서 다시 쓰는 건 역자일 뿐인데 뭐 그리 목매는지 모르겠네요. 1Q84 2권 모두 사서 읽어봤는데. 이걸 책이라고 쓴건지.. 중2병 환자들이 보면 좋아할 책이긴 해요.
Commented by 너비아니 at 2009/09/17 10:18
한참을 숨도 못쉬고 공부해야할 중2때 연애라니... 이래서 우리나라가 안되는 것입니다. 전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었는데 양을 둘러싼 모험 쪽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Commented by aleph at 2009/09/17 10:25
장편과 단편의 선택에 대해서 100% 공감합니다. 저는 빵가게 습격과 재습격 시리즈, 쌍둥이에 대한 단편들도 좋아합니다 (먼산). 세계의 끝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를 좋아하면 양을 둘러싼 모험과 댄스 댄스 댄스도 마찬가지로 좋아하는 성향이..
Commented by 파인로 at 2009/09/17 10:31
대체로 중2 시절에 접한 것은 평생 갈 법한 뭔가를 남겨놓더만.
Commented by 17호 at 2009/09/18 05:52
ㄴ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사춘기를 그때쯤 주신것... 아니 전후가 잘못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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