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오랜만에 서울아트시네마에 가서 이한상과 장철의 무협영화를 보려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늦잠을 잔 관계로 이한상의 [강산미인(江山美人, 1959)]은 포기하고 장철로 달리기를 꾀했다. 만땅의 준비를 갖추고 서울로 가려는데 버스를 두 번 놓쳤다. 내 잘못이 아니라 망할 놈의 버스가 정류장을 그냥 통과해 버렸다. 거의 진중권만큼 꼭지가 돌았다. 그러다 영화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두려워 다른 버스를 탔는데, 어랍쇼. 원래 타던 버스보다 더 빨리 당도했다;; 조금 어이없어 하며 낙원상가 4층, 서울아트시네마로 어슬렁 갔는데 또 어랍쇼. 점심밥 먹으러 갔는지 매표소 누나가 없었다;;;; 창구에는 '곧 돌아오겠삼(BACK SOON)'이란 말만 덩그러니 있을 뿐...... 내가 텅 비어있는 매표소 주변을 처량하게 맴돌고 있으려니 어쩐지 담벼락에 앉아 한담을 나누던 여자애 둘이서 비웃고 있는 거 같았다. 민망해진 나는 밥부터 먹기로 했다. 종로에는 싸고 허름하고 오래되고 맛나는 식당이 좀 있다. 허나 그런 식당들이 뒷골목에 숨어있어 종로 주변에는 먹을 데 진짜 없다는 오해를 많이 산다. 내가 서울아트시네마에 갈 때마다 애용하는 식당은 탑골공원 뒤편에 있는 유진식당이다. 유진식당 사장님은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이리 내려오셨다는데, 전국에서 가장 싼 진짜배기 평양냉면을 만든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홍어무침 작은 거(3000원)과 평양냉면(4000원)을 시켜 먹었다. 여기 홍어무침은 퍽 매콤한 편이고, 평양냉면은 매콤달콤 냉면에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엄청 실망할 테다. 유진식당 평양냉면은 조미료를 쓰지 않고, 순도 높은 메밀면을 반죽해 뽑는다. 진짜 메밀로 만든 면발은 가위 필요 없이 이로 뚝뚝 끊어진다는 걸 명심하라. 국물맛은 구수한 메밀향 나는 육수에다 심심한 감칠맛이 난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오는데 사람이 많을 때는 합석해야 한다. 오늘도 역시 돈과 자존심 문제로 막걸리에 푸념하는 할아버지 두 분과 합석해서 냉면을 먹었다. 여튼 다시 서울아트시네마로 갔다. 뿔테 안경을 쓴 매표소 누나가(사실 내 또래처럼 보여서 누나인지 아닌지 나이 여부는 잘 모르겠음)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장철의 [오독(五毒, 1978)]과 [외팔이(獨臂刀, 1967)] 표를 끊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처음으로 신파 홍콩무협의 선두에 섰던 거장 장철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오독]은 장철의 후기 걸작으로 꼽히는 영화다. '오독문'이란 문파에는 다섯 제자가 있었는데 첫째는 지네, 둘째는 뱀, 셋째는 전갈, 넷째는 도마뱀, 다섯째는 두꺼비를 닮은 권법을 익혔다. 허나 이들이 무림에서 악행을 많이 저질러 악명이 높은 바, 장문인은 여섯째 제자에게 사형들을 찾아 문파를 정리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물론 사형들은 '오독문' 출신임을 숨기고 있어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사형들보다 무공은 딸리지만 머리 잘 굴리고 능청스러운 여섯째는 미션 임파서블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장철의 [오독]은 짜릿하고 음흉한 오락이다. 보고 있으면 중독될 법한 영화다. 오독문의 제자들은 서로 정체를 모른다. 사숙이 남긴 보물을 두고 벌어지는 음모에 여섯 제자들이 모두 말려들면서 이 홍콩무협은 거의 스릴러적인 성질이 된다. 관객은 뻔히 아는 정체를 극중 인물들이 서로 모른다는 점에서 첫째와 둘째/(얼굴을 모르는)셋째/넷째와 다섯째 - 그리고 여섯째의 대결 구도는 묘한 서스펜스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장철은 무술 장면에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무림 고수들의 혈전을 잡아냈다. 살인 주먹이 치열하게 오가는 장면들은 결코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다. 또한 '만침의'를 비롯한 유혈낭자의 장면도 당대 시기를 생각하면 대단히 강도 높은 것이다. 강호의 의리와 음모를 뒤섞어 참 재미나게 찍어냈는데 재담까지 있다. 비열한 현관 나으리 녀석도 죽여야 하지 않느냐는 여섯째의 물음에 넷째의 대답은 이렇다. "까마귀는 다 까맣다. 죽여도 어차피 똑같은 놈이 관리로 올 텐데, 그럴 때마다 어찌 다 죽이느냐?" 마침내 [오독]을 다 보고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장철 정말이지 물건인 거 같았다! 아직 다음 영화가 아직 35분 정도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종로3가역 6번 출구 부근 '희망상회'를 끼고 돌면 골목에 떡 하고 있는 찬양집 해물칼국수를 먹으러 갔다. 자그마치 40년 전통의 칼국수집이다. 여기는 메뉴판이 없다. 해물칼국수(4000원)으로 통일. 되게 친절하고 사리(면) 달라면 더 준다. 그런데 10분쯤 기다려도 칼국수가 안 나오는 거였다. 똥줄이 좀 타기 시작했다. 결국 영화 시작 20분 전에 칼국수가 나왔는데, 아이구 이런 맙소사, 양이 엄청 많다 ;; 급히 훅훅 불어가며 면을 겨우 다 먹고 보자 면발 아래에 홍합과 조개와 미더덕이 그득하게 쌓여 있었다 ;;; 미친놈처럼 칼국수를 목구멍에 쏟아넣고 나니까(국물은 조금 남겼다) 영화시작 5분 전이라, 다시 낙원상가로 막 뛰어가 땀투성이로 객석에 앉았다. 그리하여 보게 된 장철의 출세작 [외팔이]..... 쇼브라더스의 전성기 시절 나온 걸작이며 '외팔이 시리즈(독비도 시리즈)'의 1편이다. 의리의 싸나이 방강은 사부님의 철부지 외동딸과 사형들에게 왕따를 당하는데, 급기야 딸에게는 오른팔까지 잘리고(마치 김용의 무협소설 '신조협려'에 나오는 양과와 곽부를 사이를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만다. 그런데 사부님의 문파가 장비신마라는 마두에게 풍비박산이 날 위기! 외팔이가 되었어도 그는 심성 올곧은, 천상 싸나이였던 것이라. 떨쳐 일어나 사문을 구하려 달려간다! 서극의 [칼(刀, 1995)]또한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 외팔이 검객에게서 장철 스타일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강렬하고 호방한 액션 장면과 비장한 기운이 펄펄 끓는 장면은 역시 여기서부터 본격적이다. 영화를 보는 도중 칼국수 국물이 소화가 되었는지 살인적인 요의(오줌 욕구)가 밀려왔으나 끝까지 자리에서 버틸 만큼 영화는 환상적이었다. '얀데레' 외동딸(썅년)을 쿨싴하게 버리고 떠나는 방강의 모습조차 마음에 쏙 든다. 오늘 본 장철의 두 걸작은 황홀한 영화적 경험이었다. 컴컴한 낙원상가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는데 눈발 날리는 산행로를 비틀대며 내려가는 방강의 뒷모습이 눈앞에 자꾸 어른거리더라. 참말로 강호의 도가 바짝 서는 무협영화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벌써 밤 10시. 시간이 엄청 빨리 갔다. 장철 감독이 내 휴일을 다 날려버렸고 내일 다시 출근하여 땡볕에 카트를 밀어야 하지만 후회 없다. [홍콩영화특별전 - 강호의 도를 묻는다]는 이번달 2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한다. 좋은 영화들 많이 봤으면 좋겠다. 일단 장철을 강력하게 권한다. 나는 서울아트시네마의 알바는 아니다. 지지하긴 하지만 말이다. 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음 속으로 유인촌 장관님과 영등위와 영진위 욕을 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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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등록된 덧글
다른 작품에서도 데즈카 오사무는..
by 놀자 at 12/08 개념글 by 그레이트무타 at 12/08 정말 꼴릿한 리뷰네여. 본격 사.. by 현골 at 12/08 허어... 미사고의 숲으로 매우 큰.. by DOSKHARAAS at 12/05 ㅠㅠ by 위래 at 12/03 지금 미사고의 숲을 조금씩 읽고 .. by 꽃가루노숙자 at 12/03 왠지 드립을 치고 싶었지만 드립을.. by 듀론9G at 12/02 겨울엔 영화가 딱이죠.^^ by 김정수 at 12/02 모드 비스트!!!!!!! 이예!!!! by 파르마콘 at 11/26 대 찬사네여... 아 보고싶어진다 by 현골 at 11/26 라이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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