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백분토론을 보다 주성영 의원이 촛불시위를 '천민 민주주의'라 규정하며 꿈뻑꿈뻑 하는 걸 보고 그럼 그 사람들 표로 당선된 당신은 뭔가 하는 뜨악한 생각이 들었다. 당신을 뽑아준 고것은 무슨 민주주의일까. 자기 얼굴에 가래침 뱉기 아닌가. 희한한 양반일세. 혹시 주성영 의원님은 국민을 '천민(賤民)'으로 보고 있지 않은지 의심해볼 일이다. 천민 민주주의라니, 이만하면 독설의 차원을 넘어서 대국민 폭언이라 할 만하다. 값싸고 질좋은 미국산 쇠고기 좀 먹어보려 하는데 다 된 밥상을 엎어버리니 심기 불편하신 것은 십분 이해하지만 한 나라의 의원씩이나 되셔서 어찌 그런 말씀을? 그렇지만 한편으로 국민을 천민으로 보는 그러한 모습이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다 같은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란 것이 참 무섭다. 아 다르고 어 달라서, 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데, 때로는 수천만을 떼로 살리기도 죽이기도 한다. 대한민국 보수의 탈을 쓴 극우란 사람들의 말주변은 참 좋아서 한동안 '국익'이란 말로 싸잡아 서민들의 피눈물을 강요했다. 국익이란 말은 우리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는 애국심을 뒤흔든다. 황우석 줄기세포도 국익, 이라크 파병도 국익, 아프가니스탄 파병도 국익, 재벌도 국익, 한-미 에프티에이도 국익, 미국산 쇠고기까지 온통 국익논리의 포장이다. 그러나 국익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사람들이 착각하고, 극우가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사회적 이익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분배된다는 착각이다. 하지만 여태껏 눈으로 똑똑히 보고 몸으로 똑똑히 느꼈듯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정부의 정책 하나를 가져다 놓고 뜯어보아도 어떤 계급에게는 이익이고 어떤 계급에게는 손해다. 바로 이것이 국익논리의 진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직 후보였을 때 그의 '경제'란 말도 삽시간에 온 국민을 사로잡았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었다. '경제'가 누구를 위한 경제인가에는 별 의심 없이, 그냥 경제에 열광했고 이명박에 열광했다. 그리고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실 앞으로 벌어질 일은 뻔한 일이었다. 기업 프렌들리는 재벌 프렌들리였고, 청계천을 팠다는 추진력은 독재에 가까운 독선이었다는 것. 집권 백 일만에 벌어진 참사를 목도한 우리는 이제 침울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경제를 이야기한다. 경제성장률이 고작 사 퍼센트래. 운운. 그러나 설사 경제성장률이 십 퍼센트여도 그 중에서 우리의 지갑 속으로 들어올 몫이 얼마인가가 중요한 것이지 경제성장률 숫자놀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모르는 차이가 억압하는 계급과 억압당하는 계급의 차이다.
기득권 세력은 언제나 자기 계급의 이익을 철저하게 지켜왔다. 그 계급이 왜 기득권인가.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한번쯤 진지하게 왜 부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서민들은 더 가난해질까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계급을 따지는 것은 국민들을 분열시키는 종북좌익의 선동이라고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국민들은 이미 계급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계급'의 존재를 알기란 아주 쉽다. 삼성 회장과 당신은 과연 똑같은 국민일까요? 아니오. 그렇다면 당신은 노동자입니다. 헉, 내가 노동자라고?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예비 노동자'들이다. '노동자(勞動者)'란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로 나와 당신과 우리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 노동자 계급의 이익이지 국익이나 경제로 포장된 자본가 계급의 이익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파업과 노사협상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 지겹고 고통스런 싸움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싸우길 포기하고 자본가 편에 선다면 우리는 마침내 완전히 몰락하고 말 것이다.
장장 한달이 넘도록 길게 이어지고 있는 촛불의 행렬이 근사하다. 이번 촛불시위의 다양성, 비폭력성, 비권력성은 분명 옛적의 촛불시위보다 진일보한 풍경이다. 중고생들이 너도나도 촛불을 나눠들고 행진하는 모습은 '판타스틱'하다. 그러나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이 그저 오늘날 광장의 아나키적 분위기를 즐기고 말아버린다면 소중한 촛불은 끝내 또 지리멸렬하게 꺼질 것이다. 촛불이 점점 줄어드는 당금의 상황에서 국민대책회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촛불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모습은 바람직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광장을 떠나서도 보다 더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당면한 광우병이나 민영화뿐만 아니라 계급의 문제다. 몸이 광장에 있는 사람과 마음이 광장에 있는 사람 모두를 포괄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노동자 계급'이란 사실이다.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계급이다. 곰곰 생각해보아야 한다. 나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대한민국 역사에 깊이 고착화된 천민자본주의와 새로이 휘몰아치는 신자유주의 바람 속에서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촛불은 오늘에만 켜진 것이 아니요, 어제도 그저께도 그보다 훨씬 전에도 매일마다 켜졌다. 지금 광장에 뛰쳐나온 사람들은 농민과 노동자가 괴로워하며 죽어갈 때 폭력시위라 지탄하며 침묵했었다. 당신이 서있는 광장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깨지고 멍들어 쓰러진 곳이다. 그동안 당신은 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나. 그동안 당신은 어떤 계급이었나. 대한민국 일자리의 반절이 비정규직이고 젊은이들의 팔십 퍼센트가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나라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고 살아갈 나는 노동자 계급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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