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2008)

제목 그대로다. [추격자]는 빠르다. 화면에서 쿵쿵 날뛰는 심장이 만져지고 후끈한 땀냄새가 끼치는 듯하다. 폭발을 거듭하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엄청난 속도감이다.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또 야생마처럼 달린다. 달리는 놈은 엄중호(김윤석)만이 아니다. 영화 전체가 내내 헐떡이는 숨을 뱉으며 쌩쌩 내달리고 있다. 폭발하는 듯한 속도감은 영화 속 인물이 달리기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 자체가 가져다준다. 범인은 처음부터 밝혀져 꽁꽁 묶여 있지만 추격하는 대상은 지영민(하정우)의 몸뚱어리가 아니라 연쇄살인마의 악마적인 실체다. 도망가는 것도 몸뚱이가 아닌 실체다. 실체를 잡기 위해서 추격하는 것이다.

한국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여기서 공권력, 경찰은 호구다. 이들은 무기력하고 정체되어 있다. 온갖 절차와 권력투쟁에 목을 매 추격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이다. 연쇄살인범은 의자에 가만히 앉아 모든 걸 다 털어놓는데 오히려 거기에 대처하지를 못한다. 여기서 연쇄살인범 지영민의 캐릭터가 대단하다. 여자 머리에 정(釘)을 망치로 때려넣는, 상식을 배신하고 무식하다못해 괴물같은 살해방식을 제쳐두고라도, 지영민은 순진한 얼굴과 싸늘한 웃음만으로 공권력을 조롱하며 악마로 군림한다. 너무나도 태연하고 여유를 잃지 않는 악마는 도무지 손이 닿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몸뚱이를 피떡이 되도록 두들겨패도 진짜 실체는 건드리지도 못하고, 악마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세상을 비웃고 있다.

또 지영민을 추격하는 추격자 엄중호는 어떠한가? 엄중호는 출장안마소를 운영하며 여자들의 성(性)을 갈취하는 '쓰레기'다. 아파 죽겠다는 여자를 몸 팔러 나가라고 윽박지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엄중호가 지영민을 추격하는 동기는 어떤 정의감이나 연민,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밥벌이 수단을 빼앗겨 빡탱이가 돌았기 때문이다. 씨발 놈아, 내 꺼야! 왜 맘대로 건드려? 엄중호는 자기 물건을 맘대로 훔쳐간 지영민을 두들겨 패서라도 되찾고 싶다. 하지만 동기는 그러했으나 추격이 진행될수록 엄중호의 이유는 또 다른 것이 있음이 드러난다. 지영민에게 많은 여자를 빼앗겼으나 유독 김미진에게 집착하는 데에는 그녀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라서라기보다는 유일하게 속죄의 열쇠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엄중호, 지영민 둘 다 나쁜 놈인데 엄중호는 개새끼 씹새끼 소리지르며 지영민을 두들겨 팬다는 게 우습다. 하지만 악질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성매매를 하는 엄중호는 물론 나쁜 놈이지만, 지영민은 엄중호와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사악한 놈이다. 자기보다 더 강력한 악마와 전면적으로 마주한 엄중호는 그간 의식하지 못했던 죄를 어렴풋이 느낀다. 암세포처럼 달라붙은 죄를 다 없애지는 못해도 닿는 부분이라도 없애고픈 마음이 생긴다. 바로 자신이 김미진을 지영민의 아가리 속으로 내몰았고 딸아이는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게 생겼다. 속죄하는 방법은 김미진을 구하고 지영민을 끝장내는 것 뿐이다. '나도 나쁜 놈이지만, 너는 더 나쁜 새끼야. 내가 꼭 죽여버릴거야.' 마치 처절한 자위행위와도 같다. 나보다 더 나쁜 놈을 잡아서 착한 놈이 되고 싶다는 치졸하지만 절박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스스로도 근원을 모르는 엄청난 분노의 형태로 나타난다.

둘이 한자리에 있는 공간, 둘이 한자리에 있는 장면은 적다. 골목길 언덕길 쫓고 쫓기는 것이 아니라, 엄중호는 죽어라 달리는데 지영민은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다. 하지만 [추격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엄중호와 지영민이 서로 할퀴고 물어뜯는 듯한 인상을 준다. 두 인물 사이 긴장이 팽팽하고 파괴적이다. 영락없는 야수들의 싸움이다. 엄중호는 추격하고, 지영민은 도망간다. 도망자는 추격자보다 훨씬 강하다. 과연 추격자는 도망자를 잡을 수 있을까? 삑삑 증기를 뿜어내고 뚜껑이 달칵거리며 금방이라도 물이 넘칠 것 같은 화면, 보는이는 눈을 떼기 힘들다.
by 콘라드 | 2008/02/15 00:28 | 영화보기 | 트랙백(1)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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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블로그 at 2008/02/19 13:47

제목 : 제 밥그릇은 제 손으로 - 추격자
허 참, 신인감독이 만든 장편영화라고 보기에는 너무 교활하고, 능글능글하다.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잡힐 듯 말 듯한 추격이 계속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김이 빠지기는 커녕 영화를 감상하고나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니. [복수는 나의 것]이나 [살인의 추억]이 거친 이야기를 말쑥하게 뽑아낸 느낌이 있다면, [추격자]는 이런 이야기는 이렇게 투박하고 간결하게 그려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어떤 패기마저도......more

Commented by 이카루스 at 2008/02/17 00:41
영화 재밌겠네요. 물론 리뷰는 내렸습니다. ㄳ
Commented by 이카루스 at 2008/02/17 13:32
그리고 왼쪽 위에 반노동기업 이랜드 반대...
반대하는건 좋은데, 시위좀 그만하라그래 씨발람들아 ㅠㅠ
Commented by 콘라드 at 2008/02/17 17:03
이카루스/ 회사가 용역깡패까지 고용해 두들겨패는 협상거부 상황에서 시위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사수대에서 치고받는 이카형은 불쌍하지만.....ㅋ
Commented by 어떤 맥잡 at 2008/02/19 13:52
쩝. 문제는 이랜드 같은 대형마트 아니면 살 곳이 없는 난감한 주머니 사정..
이랜드그룹의 만행같은거야 검색하면 수분내로 나옵니다만 제 핸드폰 고리엔 이랜드 클럽 멤버쉽 카드가 있구먼유..
Commented by 콘라드 at 2008/02/19 15:45
어떤 맥잡/ 텅텅 빈 주머니가 슬프지만 우리네 주머니를 더 가볍게 하는 악당이 바로 이랜드같은 천박한 기업이라 여깁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우리 일로 여기고 가능한 만큼 싸우는 것이 슬픈 주머니를 위한 올바른 접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건 [추격자] 글인데 이랜드 관련 글에 댓글 달아주시지... 우앙.
Commented by 어떤 맥잡 at 2008/02/23 00:17
우앙. 저도 리플확인하느라 들어가도 안보이길래 복습하다 여기서 봐서 놀램.
이카루스 형아 댓글 보고 달다가 그만..
Commented by 어떤 맥잡 at 2008/03/09 18:21
시간 때문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안 보고 추격자를 보게 되었는데 리뷰대로 좋더군요 ㅎㅎ
Commented by 콘라드 at 2008/03/10 20:15
어떤 맥잡/ 젊은 감독의 혈기와 패기가 느껴지는 터프하고 하드보일드한 스릴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인터뷰를 읽어보니 나홍진 감독님 성격이 좀 터프하더군요. 연쇄살인범에 대한 판단과 해석에 있어서도 쫌 과격하고 폭력적인 경향이 보이고요. [추격자]를 보면 그게 은근히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어떤 맥잡 at 2008/03/11 08:33
확실히 보고 나서
'살인자는 원래 이러이러한 놈이라서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얘들도 불쌍하다.'란 내용이 없어서 깔끔하다고 느낀 걸 보면..
인터뷰는 한번 찾아봐야 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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